개혁주의 문화관 김재윤 저 SFC(학생신앙운동) 2015년 12월 11일
지금껏, ‘교회’라는 주제 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에 어떤 태도나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집중되어 왔거나 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왔다. 그래서 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성은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문제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기독교 문화에 대한 성경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에베소서 1장 21-23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 그리고 만물이 삼각관계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충만하게 하심으로써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곧,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섬김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구약의 교회는 구체적인 예배로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로 여호와는 그분의 말씀을 주시면서, 그분의 언약을 선포하시고, 그 언약에 합당한 백성 속에 임재 하신다.
신약교회도 같은 정체성을 가진다. 모이기에 힘쓰고,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성찬을 행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불러 모으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인 하나님의 영원한 성소에서 교회에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복음은 단지 예수님을 증거하고 제시할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직접 자신을 주시기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교회에 채우신다. 이런 점에서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머리인 그분의 몸이다. 자신을 주시는 주님은 주님 안에 있는 은덕들을 말씀을 통해 주시면서 교회를 채우시고 자라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신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우리는 실제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으며 그분 안에서 연합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성찬을 받는 교회는 영생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몸을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셨다.
직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고,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의 증인이며, 제사장으로서 감사의 산 제물을 드리고, 왕으로서 죄와 사탄에 대항하여 싸우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설교와 성례를 시행하시면서 교회를 풍성하게 만드시는데 직분자들을 사용하신다. 직분은 예배에서 구체화되고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직분자의 섬김의 핵심은 복음 설교, 권징, 성례이다. 이것들은 예배로 구체화되는 교회의 근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또한 개인적인 신앙고백도 간접적인 은혜의 방편이 된다. 고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찬양과 기도와 권면으로 복음 설교를 복창하면서 그 복음의 원천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다.
그래서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개혁주의가 말하는 문화관의 독특성은 바로 교회 중심성에 있다. 개혁주의 안에 논의되는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세 패러다임은 공통적으로 교회 중심이다.
아브라함카이퍼는 국가와 프랑스 혁명의 정신 사이에서 교회의 길을 모색하며, 사회적인 사원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영역 주권’ 사상을 말했다. 다양한 삶의 기둥들을 인정하고,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교회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나갔다. 이런 문제의식을 그는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풀어냈다. 카이퍼의 입장은 교회가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려는 중세의 모델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서구 교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나 교회가 ‘나란히’ 있어야 함을 정립하였다. 국가, 교회, 문화, 학문,교육, 언론 등의 다양한 영역이 각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을 이론화 한 것이 바로 ‘영역주권’이다.
교회와 기독교는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었는데, 정작 교회는 이런 중대한 변화에 둔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는 스스로 ‘신칼빈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영역주권’의 문제에서 모든 삶의 고유한 영역들은 교회나 신앙 고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교리적인 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확신 또는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유한 삶의 영역들이 ‘주권’과 분리되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각각의 주권 영역들이 가지는 다원성과 신앙고백적 자유를 가진 교회들의 다양성을 주장했는데, ‘일반은총’이란 개념을 통해 막연한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막았다. 특별은총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은총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삶의 영역들이 어떻게 질서를 이루며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곧 이러한 카이퍼의 사상을 통하여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회된 모습을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는 토대를 차단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끌라스 스킬더는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바탕 위에서 바르트를 이해하고 비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개혁교회의 3대 신앙고백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종합하려고 시도했다. 스킬더가 신앙고백 중심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해서 단순히 신앙고백 자체를 보수적으로 고수하고 반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영감들을 찾기 위해 씨름했다. 그 결과 카이퍼의 유산 자체를 너무 절대화해서 고집하려는 시도를 배제하고, 신앙고백은 역사적 자료로 존중하지만, 끊임없이 구체적인 삶과 문화라는 교회의 실제적인 씨름에서 빛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큰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카이퍼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로인하여 시킬더는 제명되었으나 이런 결정에 동의하지 않던 자들은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를 형성하게 되었다.
바트르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은 모든 신적인 것, 하나님 나라의 가능성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찾는 것이다.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기에, 세상의 문화, 역사, 철학, 인간성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존재하지 않기에 계시를 이해하는 것도 부인 되었다. 이에 대하여 스킬더는 하나님의 계시의 실재성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하나님 자신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바르트는 모든 연속성과 연관성을 부인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이 작업을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추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킬더와 구별된다.
스킬더와 바르트는 모두 일반적인 차원에서 사람과 사람이 가진 가능성에서 출발하는 신학을 부정하는 한편, 모든 가능성은 다른 방향, 곧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공유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그리스도 중심 주의를 매우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차이점은, 바르트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떤 하나님 나라의 흔적이나 하나님 계시의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스킬더는 좀 더 전통적인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위에서 다룬 학자들의 사상을 비교하며,
우리의 개혁주의 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모색한다.
대안적인 패러다임들로 ‘자연법-두 왕국론’이라는 틀
혹은,, ‘나그네와 행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요약되는 서술을 선택하여
개혁주의 문화관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하려 시도했다.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키워드로서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스킬더가 ‘문화명령’을 사용했다면, 밴드루넨은 ‘자연법-두왕국론’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법’ 사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도덕법을 모든 사람들의 심령의 비석에 새겨 놓으셨고 양심의 증언으로 밀미암아 모든 인간은 고들의 기초적인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한편 ‘두 왕국론’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기관들과 활동들을 통치하시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적 왕국인 교회의 경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통치하시는 반면, 국가와 모든 사회기관들인 시민 왕국의 경우에는 창조주와 보존자로서 통치하신다. 따라서 ‘자연법-두왕국론’은 하나님께서 교회가 아닌 국가, 사회, 문화적인 영역을 다스리실 때, 자연법에 근거해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밴드루넨의 패러다임은 세속화된 문화에서 기독교의 대응 전략을 변화시키는 영향을 미쳤으며, 신자들이 어떻게 신앙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다. 벤드루넨이 제시한 자연법과 두왕국론은 인간의 도덕적 감각과 세속 질서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법은 <------------------------------------------------------------------->개혁주의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도덕적 질서 강조 타락한 인간 본성이 이성을 왜곡하여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함
보편적 도덕 원칙 중시 오직 성경에 근거
보편적 도덕 원칙 중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문화가 재창조되어야 함
두왕국론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를 명확히 구분하여여 각각의 역할 강조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영역에 미치며,
교회와 국가가 상호 연관되어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침.
위와같이 벤드루넨의 자연법과 두왕국론이 제시하는 문화관은 일정 부분 문화의 도덕적 질서와 역할 분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개혁주의 문화관이 강조하는 성경적 계시, 타락한 인간 본성에 의한 한계,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통합적 문화 변혁의 비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추천합니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원하는 분
2. 나의 문화관이 어떤 형태를 닮아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하는 분
3. 문화에 대한 역사(신학)적 흐름을 알고 싶은 분